행동주의의 창설자
존 왓슨은 1878년 1월 9일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나이 겨우 열세 살일 때, 그의 아버지는 가족 곁을 떠났다. 그래서 왓슨은 어쩔 수 없이 농장에서 가난과 고독 속에 자라야 했다. 왓슨은 자신이 어릴 적에 가난하고 다루기 힘든 학생이었다고 회고했다. 또 자신도 무모함과 폭행으로 점철된 아버지의 전철을 그대로 밟을 운명인 것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그러나 왓슨은 16세에 퍼먼 대학교에 등록했다.
왓슨은 5년 후 이 대학을 졸업하고 심리학과 철학에서 박사 학위를 따기 위해 시카고 대학으로 옮겼다. 1903년에 철학을 포기하고 심리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08년에 그는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실험 및 비교 심리학의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때 이미 왓슨은 훗날 심리학의 새로운 분야가 될 행동주의에 관한 아이디어들을 품기 시작했다. 이반 파블로프의 연구에 영감을 얻은 왓슨은 생리학과 생물학, 동물 행동 그리고 아이들의 행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왓슨은 아이들도 보다 복잡한 존재이긴 하지만 그래도 동물과 똑같은 원칙에서 움직인다고 믿었다. 왓슨은 모든 동물이 경험을 통해서 조건화된 신경 경로들에 근거하여 상황에 반응하는 매우 복잡한 기계라고 결론을 내렸다.
1913년에 왓슨은 컬럼비아 대학에서 '행동주의자가 본 심리학'이라는 제목의 강의를 했다. 이 강의는 심리학의 연구 방법을 크게 수정할 것을 요구했다. 행동 연구에 있어서 내성법을 포기하고 행동을 의식과 별도로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는 심리학이 동물과 인간의 행동을 구분해서는 안 되며 또 행동을 예측할 뿐만 아니라 통제까지 할 수 있는 원칙들을 개발하는 객관적인 자연과학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왓슨은 행동의 중요한 요소가 유전이라는 견해를 포기하고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구조적인 이론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 강의는 같은 해에 '사이콜로지컬 리뷰'에 게재되어 '행동주의자 선언'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왓슨은 공동 연구자와의 추문 때문에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 1920년까지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일했다. 인간 행동과 심리학에 관한 지식이 풍부했던 왓슨은 1924년에 광고업계로 들어가 미국에서 가장 큰 광고 회사인 J. 월터 톰슨의 부사장이 되었다.
왓슨은 인생의 마지막 5년을 코네티컷 주 농장에서 은둔자로 살았으며 좋지 않았던 자녀들과의 관계는 더욱 나빠졌다. 죽기 직전에 왓슨은 상당수의 편지와 미발표 논문들을 불태웠다. 그는 1958년 9월 25일 세상을 떠났다.
행동주의
행동주의에 따르면, 사람은 수동적이며 단순히 고전적 혹은 조작적 조건형성을 통해서 환경의 자극에 반응한다. 요약하면, 개인은 빈 서판이고 그 개인의 행동은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강화의 결과이다. 행동이 관찰할 수 있기 때문에, 행동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고 측정하기는 쉽다. 오늘날 행동주의는 20세기 중반의 인기를 더 이상 누리고 있지 않지만, 그래도 그 영향력은 양육과 교수법, 동물 훈련 그리고 해롭거나 잘못 적응된 사람의 행동을 바꾸는 일에서 지금도 여전히 확인되고 있다.
꼬마 앨버트 실험
존 B. 왓슨은 개들과 조건형성에 관한 이반 파블로프의 실험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사람의 내면에서 감정적 반응을 고전적으로 조건화함으로써 행동의 조건 형성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킬 수 있기를 바랐다.
이 실험의 참가자는 겨우 9개월 된 아기였다. 왓슨은 이 아기를 "앨버트 B"라고 불렀으나 지금은 꼬마 앨버트로 통하고 있다. 왓슨과 추문을 뿌린 공동 연구자 로잘리 레이너 (Rosalie Raynor)는 이 아기를 다양한 자극에 노출하고 그에 대한 반응을 기록했다. 자극은 토끼와 원숭이, 하얀 쥐, 불붙은 신문지와 마스크 등을 포함했다. 처음에 이 아기는 어떤 자극에도 전혀 두려움을 보이지 않았다.
아기를 흰색 쥐에게 두 번째로 노출할 때, 왓슨은 동시에 해머로 금속파이프를 때려 큰 소리를 내도록 했다. 아기는 그 소리에 놀라 울기 시작했다. 그다음에 왓슨은 큰 소리와 동시에 흰색 쥐를 노출하기를 반복했다. 그러자 아기는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는 가운데 흰색 쥐만 보아도 울기 시작했다.
• 중성 자극은 흰색 쥐였다.
• 무조건 자극은 해머로 금속 파이프를 때려서 낸 큰 소리였다.
• 무조건 반응은 공포였다.
• 조건 자극은 흰색 쥐였다.
• 조건 반응은 공포였다.
파블로프와 마찬가지로, 왓슨은 중성 자극에 대한 조건반응을 창조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왓슨의 경우에는 조건반응이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었고, 단순히 생리적인 것이 아니라 감정적인 반응이라는 점이 달랐다. 더 나아가 왓슨은 꼬마 앨버트의 내면에서 모든 흰색 대상에 대한 공포의 반응이 새로 일어나는 것을 확인했다. 이 같은 현상은 '자극 일반화'로 알려지게 되었다.
예를 들어, 꼬마 앨버트 실험에 참여한 아기는 조건 형성 때문에 흰색 쥐를 볼 때만 아니라 흰색 코트에서부터 산타클로스의 흰색 수염까지 다양한 흰색 물체들을 볼 때도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자극 일반화'란?
실험 대상자가 원래 조건 형성된 자극과 똑같지 않은 비슷한 자극에도 반응하는 것을 말한다.
꼬마 앨버트 실험에 대한 비판들
왓슨의 꼬마 앨버트 실험은 심리학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실험임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이유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아기의 반응은 객관적으로 평가된 것이 아니고 순전히 왓슨과 레이너가 주관적으로 해석한 것이었다. 또 이 실험은 윤리적 문제들을 야기했다. 지금 만약 누군가가 이 실험을 하려고 한다면, 미국심리학회로부터 비윤리적이라는 지적을 받게 될 것이다. 실험 자체가 사람의 내면에 공포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실험에 참여한 사람이 실험 도중에 공포를 느끼게 될 것이라는 점을 미리 알고도 실험에 참여하기로 동의할 때만 그 실험은 윤리적일 수 있다. 그런데도, 행동 심리학자들은 왓슨과 꼬마 앨버트 실험의 결과로부터 중요한 통찰을 끌어낼 수 있었다. 꼬마 앨버트 실험은 행동 심리학 분야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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